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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한성노회 박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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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 -17

우리나라의 취업률이 최악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전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취직하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게 취업이 힘들 때 취업을 하는 것은 행운아일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취직을 하기 위해서 무언가 남들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 사람을 믿기 힘들게 만드는 일, 예를 들어 스승을 배신한 일이 이력서에 있다면 그 사람은 취직하기 힘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데 사도들을 다시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배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았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어도 베드로와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옛날 고기 잡았던 시절을 생각하며 갈릴리바다로 갔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주님도 갈릴리 바다까지 가서 제자들을 찾았습니다. 주님은 날이 새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자들에게 ‘고기가 있느냐? 고기를 잡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 말씀하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라."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배 오른 편도 던져보았을 것입니다. 배를 중심으로 수십 수백 번을 그물을 던져보았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여 기진하였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였습니다. 배 오른 편에 던지게 되면 엄청난 고기를 잡을 것이다 기대하고 던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도하고 던진 것도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던졌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그물에 고기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숫자가 153마리라고 합니다. 그 고기들이 큰 물고기라 그물이 찢어질 정도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3년 전에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사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도로 다시 사명을 주실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는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 시간에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하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

인생의 문제는 답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어려운 인생의 문제도 성경을 붙들고 거기에서 답을 얻고자 하여 기도할 때 해답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오늘 사랑이라는 말씀이 질문이 되고 해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나님으로 사랑을 하느냐?’ 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전능전지하신 하나님이 몰라서 이렇게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신 것은 베드로에게 질문으로 던져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베드로의 심장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렘 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아카페(avga,ph)하느냐? 주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질문을 주시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던지신 질문에 있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라고 하는 말은 신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둘째 : 주님이 말씀한 사랑은 신화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헬라의 신화에서 ‘제우스’는 최고의 신입니다. 그 신의 아내는 ‘헤라’였습니다. 그 두 신은 부부로서 사랑하는 신입니다.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인 에로스가 아니라 신의 사랑인 ‘아가페’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이렇게 신화적인 사랑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라고 하면서 저질적이고 또한 음란한 행위를 범하는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진리를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사이비 종교단체들이 있습니다. 이러고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의 사랑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그런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야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열정은 예수님의 사랑을 헬라의 신화와 같은 종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제자들도 신화를 꾸미려는 본능이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누가 크냐?’고 다툰 것은 신화를 이루려는 본능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랑은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이성의 욕망으로 그려진 허황된 신들의 사랑을 말하였습니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랑은 조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명예욕 권세욕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실 주님 앞에서 서로 높고자하는 것이 죄의 본성을 신화적인 것이라고 빗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고 높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생애를 신화를 창조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 면에서 신화적인 신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야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탐욕과 탐심을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하였습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셋째 : 주님이 말씀한 사랑은 철학이 아닙니다.

플라톤은 신화가 청소년들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한다고 하면서 신화를 속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플라톤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 사랑도 가증하게 여겼습니다. 플라톤은 정신적인 것이 순수한 것이라고 합니다. 영혼이 돌아가는 곳이 있는데 그 세계를 ‘아데’라고 합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 순수한 세계라고 합니다. 플라톤이 그곳의 사랑을 말한다고 하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영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처럼 느낄 정도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영적인 세계로 착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주님이 변화되시는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주님께 이곳에 초막을 셋을 지어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살자 하였습니다. 세상으로 내려가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없애고자하는 하였습니다.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옥으로 가는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서 미움 시기 다툼 분쟁이 없는 천국과 같은 변화산에서 살고 싶어 하였습니다. 변화산이 신비한 곳 천국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을 지옥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플라톤과 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각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을 신성시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죄스럽게 여기고 그런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살자하는 베드로의 생각이 거룩하게 보이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속세를 떠나려고 하는 사랑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였으니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과 철학적인 사랑과 다름을 우리는 믿습니다.

 

넷째 : 주님이 말씀한 사랑

주님은 원수들 앞에서 십자가를 짐으로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환난과 핍박받는 세상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세상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복잡한 모든 것을 죄스럽게 여기는 것은 플라톤과 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마귀에게 속은 것이며 거짓된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생각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영혼에 관한 것만 아니라 육신의 삶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할 때, 이것은 영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사랑도 포함된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낳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한 대로 육신적인 사랑을 믿음으로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요 또한 영적인 생활이라고 합니다. 부부간이 성경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요 또한 이 땅에서만 누리는 이성적인 사랑도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데아’, 즉 순수한 세계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주신 이성적인 그 사랑을 죄악시하는 것은 진리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랑이 없이 자신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겠습니까? 육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악하다는 것을 자신들이 진리를 다 이해를 못하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성경에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은 부부간의 사랑을 거부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죽었습니다. 유다의 계통으로 오시는 주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증하게 여기는 아데아 철학은 헛된 속임수라고 합니다.

(골 2:8) (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육신 적인 모든 것을 죄악시하고 마귀시하여 육신적인 일에 무시한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을 우상 식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 속임에 속으면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을 ‘아카페’라고 하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신데 육신으로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한 우리를 전적으로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하고 그 사랑을 뜨겁게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아가페’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면서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가 나를 하나님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므로 믿음이 생기고 그 마음에 사랑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베드로는 주님을 잊고 지난밤에 고기를 잡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사랑하고 애정이 넘치는 음성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말씀을 듣는 순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우리의 대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고백할 때 우리에게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 음성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귀한 일군이 부르심을 받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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