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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의 적용과 거부할 수 없는은혜(한성노회 박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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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 단비와 이슬 같은 은혜

미가5:7-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없이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시지만, 정작 그 은혜를 받는 우리는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인생들에게 지혜를 주어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은혜를 깨닫도록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원어로 은혜라고 하는 말은 (카리스 ca,rij) 라고 합니다.

은혜= 은총, 총애, 호의, 은혜로운 행위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큰 은혜라고 하면 부모님의 은혜라고 말할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베푼 사랑을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베푼 것은 조부모님께 받은 은혜를 자식에게 빚을 갚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엄밀히 따져 부모님과 자식사이만 생각하면 은혜라고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과 자식이 있을 때는 위로 부모님께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아래로 자녀에게 베푼 것이 은혜를 갚는다고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갚는 은혜도 바다와 같고 하늘과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거나 도움을 받지 않고 베푼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그저 한없이 베푼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야곱의 남은 자에게 베풀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황무지에 단비와 이슬과 같은 은혜라고 하는 말씀으로 더욱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 야곱에 남은 자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성전은 파괴되고 법궤는 사라지면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왕자들이 바벨론의 군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보고 두 눈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슬에 묶여 포로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유대나라의 끝은 이렇게 비참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살아남았다고 해도 저주와 멸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남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야곱의 남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 야곱의 남은 자들이란 누구일까요?

 

하나. 절망 중에 있는 자들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의지할 때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멸망의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들을 야곱이 남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 형에게 쫓겨 부모님을 떠날 때의 기분이 세상에 버림을 받은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하늘도 버리고 땅도 버리고 이 세상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절망 중에 벧엘에서 돌베개 하며 자는 것이 그로서는 첫 원시적인 노숙이었습니다. 야곱은 말로 할 수 없는 외로움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야곱을 만나주시고 야곱의 고달픈 인생의 여행에서 하나님의 언약으로 위로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도 남은 자들이란 이와 같습니다. 야곱처럼 세상에 버림을 받은 자들은 야곱의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자 합니다. 그 남은 자는 사업에 실패한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야곱을 찾으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은혜를 베풀듯이 은혜를 베풀고자 합니다.

세상에 더 이상 소망이 없어 스스로 자해를 하려는 자들, 오직 죽음만이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면 야곱에게 베푼 은혜를 주시고자 합니다.

 

둘. 신앙으로 남은 자들

다니엘 서를 보면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가 나옵니다. 그들의 이름은 미사엘 하나야 아사랴( 바벨론이름 식으로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 라고 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남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남은 자들로서 느브갓네살 왕이 명령을 내린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하고 높은 직위를 지키기 위해서 믿음을 버리고 우상에게 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친구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우상에 절하지 않고 믿음을 끝까지 지킴으로서 신앙으로서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풀무불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자들이 곧 바로 야곱의 남은 자들입니다.

저 원수 마귀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하여 시험할 때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 야곱의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믿습니다.

 

둘째 : 단비와 이슬과 같은 은혜

야곱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 은혜는 이슬과 단비를 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남은 자들은 이슬과 단비를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땅을 비유로 들어 말합니다.

성경은 이집트의 땅과 가나안 땅을 비교하여 비유하였습니다. 이집트 땅은 나일강을 중심하여 곡물이 잘되는 곳입니다. 그 이유는 나일강이 있어 물 걱정이 없이 농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는 농사할 때 물이 풍부하여 필요하면 언제든지 물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 걱정이 없이 농사할 수 있는 땅입니다. 그런 반면에 가나안 땅은 철을 따라서 비가 내려야 농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비라고 하지 않고 씨를 파종할 때에 내리는 비를 단비라고 합니다.

인위적으로 물을 이용할 수 없는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리고 농사를 물이 부족한 땅으로서 이슬은 생명을 지탱하게 하는 젖과 같은 것입니다. 그 메마른 황무지와 같은 땅에 단비는 농사가 좌우하는 채소와 곡물에 생명수입니다. 모세는 이점을 이집트와 가나안 땅에 대하여 비교하여 말하였습니다.

 

(신 11:10)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나일강은 언제나 넘치는 물이 있기 때문에 농사에 물이 필요할 때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발로 물을 대는 것처럼 쉽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물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나일강의 혜택을 보는 것으로 인해 나일강을 신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에 그들이 신으로 여긴 나일강물을 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 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라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깨닫지 못한 무지한 백성들이었습니다.

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비유합니다. 나일강에 모든 물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집트 백성들은 그 은혜를 우상의 색욕거리로 바꾼 것입니다.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 비와 이슬이 없으면 황무지가 될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환경을 바꾸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리는 비는 단비요 매일 새벽마다 내리는 이슬은 젖과 같은 귀한 은혜입니다.

이를 시인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달콤하게 주야로 묵상하는 말씀을 그런 물로 비유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물과 같고 그 나무는 인생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시들거나 마르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황무지 같은 광야에 내리는 단비나 이슬은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채소나 곡식은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이슬에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필요 하는 만큼만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는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100% 다 받아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받아드리는 자들이 곧 야곱의 남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면 전적인 은혜요 또한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큐티를 하는 중에 성경을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을 큐티(quiet time)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는 것은 믿는 성도로서 참으로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이 깨달아져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깨닫는 말씀을 내 필요에 따라서 적용한다는 말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적용한다는 말은 이집트의 땅에 물댄 것으로 비유로 해봅시다. 이집트 백성들이 채소를 재배하거나 농사를 할 때 필요에 따라 발로 물을 댄다는 것은 농사하기 위해서 물을 필요에 따라서 이용한다. 적용한다는 말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발로서 물을 대는 것도 인간의 아주 적은 부분의 인위적이고 노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한다는 것은 발로 물을 댄 것으로 비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 가나안 땅을 들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면에서 하늘에 비가 내려서 그저 받기만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를 깨닫게 하는 것도 역시 성령의 지혜를 주신 은혜입니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결단을 하게 하는 영적인 생각도 성령의 감동하시고 감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모두를 거부할 수 없는 은혜라고 하는 뜻에서 황무지에 절대로 단비와 이슬을 흡수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인생에게 하나님의 은혜라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41편에 목마른 사슴이라고 비유합니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은혜 달리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야곱의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구원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100%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을 가나안 땅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귀환한 것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으로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내리시는 은혜를 내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단비를 메마른 땅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다 흡수하듯이 우리의 영혼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들은 산천초목이 이슬을 흡수하듯이 야곱이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전적인 은혜를 거부함이 없이 절대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매듭짓는 말씀

가나안 땅은 황무지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때를 따라 적당한 비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의 시대 솔로몬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마른 땅에 단비를 흡수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아멘으로 순종할 때 그 땅이 하늘에 응하여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찬송가 183장(통172장)에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이라고 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을 할 것입니까? 적용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이 받아드리는 은혜로 믿습니다. 실제 성경을 필요한 부분은 적용을 하고 내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적용이 함정되어 거기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가선지자는 말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노력해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군대를 동원하여 바벨론을 물리치고 해방하여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70년 기한이 다하매 유다백성들을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하나님의 기다리는 자들은 야곱의 남은 자들입니다. 그 야곱의 남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때가 되어 그들에게 단비와 이슬 같은 은혜가 임하여 포로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도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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